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무렵엔, 우울증에 걸려도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을 다들 꺼려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취업길이 막히고 혼삿길이 막힌다면서요. 또 그런 우울감 같은 것들은 정신력이 약해서 생기는 문제라면서, 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리광쯤으로 치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신건강이 화두로 떠오르게 되면서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누군가가 우울해하면 적극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권하기도 하고, 주변에서도 우울증을 더 이상 가볍게만 치부하지는 않는 상황이 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긍정적인 변화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몸을 단련하는 방법'은 모두들 관심이 있고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마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보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스트레스에 꽤 취약한 아이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멘탈이 약했던 것 같아요. 쉽게 상처 받았고, 어렵게 아물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나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면 당황해서 아는 문제도 제대로 못 풀고, 경쟁 자체를 회피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남들과 전력을 다해서 경쟁하는 게 싫어서 늘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 '너는 욕심이 별로 없구나' 였는데, 그건 제가 욕심이 없는 청렴결백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남들과 경쟁을 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뭔가를 잘 모르거나 잘 못 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받을 무언의 업신여김이 지독히도 싫었던 것 같아요. (음, 이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
남들보다 무언가를 잘 하지 못할 때, 저는 그걸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것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쟤 보다 이걸 못하지만, 그건 내가 이것을 하지 않기 때문이야.'라고 합리화를 할 수 있거든요. 쉽게 말해서 '우월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상태'로 그냥 남아있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자신 있어하는 일이라도 그걸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언제까지나 도망만 칠 수는 없었지만, 저는 경쟁하는 방법을 몰랐어요.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불가능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지막에는 절망이 있었어요. 나 빼고 모두가 완벽해 보였습니다. 왠지 인생의 실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척이나 울적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마 나의 자존감은 그 무렵,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을 것 같아요.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몰랐으므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던 시기입니다.
그 무렵 우연한 기회로 '마음 챙김'에 대해 알게 됩니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은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느끼되, 그것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으로 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는 명상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자극이 들어오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고는 합니다. 가령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했다'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화를 내는 반응'을 보이게 될 거예요. 누군가가 욕을 하는 건 기분 나쁜 일이고, 화가 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마음 챙김에서는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는 나의 감정은 그대로 느끼고 존중하되, 그걸 화를 내는 것으로 표출하는 반응은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연습을 하게 합니다. 때로 우리는 화가 난 것보다 더 많이 화를 내고는 합니다. 화나는 감정에 스스로를 맡겨버리는 거예요. 내 감정의 주인은 나여야 하는데, 내가 감정에게 끌려다니게 되고 맙니다. 꼭 화를 내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을 때, 면접에 떨어졌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우울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감정의 주인인 내가, 우울에 잡아먹혀 끔찍한 선택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감정이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건 부정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아요.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하면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맨날 화만 날까, 나는 왜 이렇게 맨날 우울하기만 할까, 하는 생각들에 빠져서 나도 몰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거든요. 어떤 자극이 있을 때 어떤 감정이 찾아오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화가 나도 좋고, 우울해도 좋고, 슬퍼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이기에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뿐이니까요. 대개 감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찾아오는 감정에 집착하는 순간 생겨나고는 합니다. 우리는 꼭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하고, 우울하면 방에 틀어박혀 세상과 나를 단절해야만 하나요? 그랬을 때 정말로 문제가 해결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감정은 내가 아니에요. 감정과 나를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가 나는 나를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생각보다 나는 별 것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울한 나를 타자화해서 바라보면, 사실 그렇게까지 우울해할 일이 아닌데도 우울해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면접에 자꾸만 떨어지던 저도, 서류에서 광탈을 하던 저도 몹시 우울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서류와 스펙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과연 내 자소서를 제대로 읽기나 한 걸까 생각도 드는 때가 반드시 있었어요.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사람이 우울해하는 건 당연한 일일 거예요. 그러니까 우울할 일에 대해서 우울해했지만, 그때의 나에게 필요한 건 '더 깊은 우울'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우울감을 느낄 때면 시간을 정해둡니다. 지금부터 30분 정도만 우울한 감정이랑 대화를 나누고, '반가웠어, 안녕, 다음에 또 만나'하고 보내주기로 약속을 하는 거예요. 물론 잘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끝없는 우울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어느 정도 감정적인 제약을 걸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감정이든 이유가 없는 감정은 없으니까, 우울이 찾아온 것도 분명 나와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찾아왔던 것일 거예요. 그럼 대화를 해보고, 손을 흔들어 보내주면 됩니다. 그 뿐입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지 않아요. 우울이랑 대화를 하는 동안에 자기연민이라는 친구를 데려와 '그냥 이대로 쭉 있어도 괜찮아'라면서 현실에게서 눈을 돌리게 만들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방법들이 저에게는 꽤나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출발선이 다른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일과 자신을 분리하는 방법도 배웠던 것 같네요. 일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선배, 후배들을 보면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일에게 잡아먹혀 번아웃에 빠지는 경우를 보고는 합니다. 어떤 종류의 숨막히는 부담감이 스스로를 짓눌러서, 어떤 일도 지속할 수 없고,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마는 거예요. 저는 그런 상황만큼은 좀 피하고 싶었습니다. 조금 덜 열심히 하고 조금 덜 완벽하게 하면 어떨까. 대신에 일을 조금은 즐겁게 하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찾는 중입니다. 일이라는 게, 즐거워지지는 않더라구요. 🤔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중요한 건 마음가짐인 것 같습니다. 벌써 명상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저는 흔들리고 고뇌하는 인간입니다. 화를 내기도 하고, 욱하는 마음에 짜증을 내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기도 해요. 다만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그런 저를 탓하거나 미워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화를 낸 상대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방법도 배우게 됐고, 충동구매 대신에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방법도 배우게 되었어요. 불안정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스스로의 내면을 천천히 탐색하는 명상을 하다보면, 내가 어떤 것들을 정말로 원하는지, 어떤 것들을 정말로 원하지 않는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 스스로와 대단히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요. 나는 의외로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여러분들께 여쭤봅니다.
당신의 멘탈은 안녕하신가요?